신황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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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 20220904-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으십시오.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22-09-10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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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역사와 정치, 사회, 인물 등 모든 것에 관심하며 소개하는 블로거, 성패소하(liangf11028)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인데요, 제가 편집했습니다. 1945815, 패망의 소식을 접한 일본인들은요, 자신들의 재산을 황급히 팔아 일본으로 밀항했어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요, 성난 군중들은 그들을 응징했어요. 19458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 보고된 폭행 사건은요, 913건이었어요. 조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천황의 위폐를 모신 신사였어요. 그뿐 아니라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도 있었는데요, 267건이 보고되었어요. 당시에 전화나 인터넷이 없었기에 그것보다 훨씬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텐데요, 주된 표적은 일제관료, 경찰, 교사, 지주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어요. 이것은 단지 조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일본이 점령했던 아시아 국가들 전체가 해방 이후 이런 상황이었어요.

    중국에서는 수많은 일본군인들이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어요. 중국의 장교들은요, 그들에게 당한 고통이 컸기에 그들을 죽여 동료들의 복수를 갚고자 했어요. 그러니까 잔인한 보복이 있었겠지요? 그런 일본군 포로 중에 간호사로 근무한 오미야 린코(大宮靜子)가 있었어요. 중국 군인들은 여자군인들을 대체로 옥에 가두었는데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었으니까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래서 그녀는 탈출을 시도했고요, 멀리가지도 못하고 잡혀 엄청난 매를 맞았어요. 후에 연합군은 일본군 포로들을 미얀마로 압송하고자 했는데요, 그 소식을 들은 오미야 린코는 매일을 눈물로 지냈어요.

    그런데 그런 그녀를 지켜 본 사람이 있었어요. 중국군 중대장으로 근무한 유운달(劉運達)이에요. 그는요, 울며 지내는 그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통역관을 데리고 가서 그녀를 심문했어요. 그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힘과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요? 유운달로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비록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지만 그도 사람이지요? 그래서 그는요, 그녀를 부대에 남아 있게 했고요, 돌봐주었어요. 그러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군에서 전역했고요, 그녀를 빼돌려 시골 농촌으로 들어갔어요. 막원혜(幕元惠)라는 중국이름으로 바꾸었고요,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얻었어요. 그렇게 잘 살고 있던 1970년대 말, 그의 집에 고급 세단 세대가 들이닥쳤어요. 중국의 고위층들이 동행했는데요, 차에서 내린 일본인은 유운달의 부인, 막원혜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부둥켜 않았어요. 그리고는 엉엉 울어요. 그 일본인은 다름 아닌 오미야 린코의 아버지, 오미야 마타오(大宮又雄)였어요. (사진자료#4)그는 당시 일본과 중국의 우호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요, 딸을 수소문하다 드디어 찾아 낸 거예요. 그리고 그는요, 딸과 사위, 손자를 일본으로 데려 가요. 그렇게 10년을 일본에서 함께 살았고요, 딸을 살려 준 사위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자신의 회사와 전 재산을 손자인 유승의에게 물려줬어요. 무려 우리 돈 17천억이에요.

    2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줬어요. 731부대, 난징대학살, 명성왕후 시해, 강제징용, 종군위안부, 서대문 형무소 등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지요? 그럼에도 유운달, 오미야 린코, 오미야 마타오, 유승의, 이 이름들은요,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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