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00505-삶에 향기가 있는 사람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19-05-04조회 : - 첨부파일 :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지난 4월 13일, 임실치즈의 아버지, 피자 신부님으로 불렸던 지정환 신부님, 원래 이름은 디디에 세스테벤스입니다. 이분이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하셨고, 한국의 시골을 아끼셨던 신부님은 살아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장례식 때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모든 만남은 하나라도 우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만났으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매년 “임실치즈테마파크”를 찾는 관광객이 20만 명입니다. 연 수익은 270억 원에 이르고,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1,000억 원이나 됩니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가 20여개이고,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개가 됩니다.
벨기에 출신의 신부님이 어떻게 한국, 그것도 시골 농촌인 임실에서 평생을 사시게 되었을까요?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신부님은 6. 25 전쟁으로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가난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올 결심을 했고, 이듬해 12월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1960년, 전주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이듬해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갔는데 시골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신부님은 동네사람들과 함께 간척사업을 벌였고 3년 만에 30만평을 일구어 가구당 3,000평의 땅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무리를 한 신부님은 담낭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양 차 고국에 돌아갔다 와보니 힘들게 간척한 땅들이 고리대와 노름으로 부자들의 손에 모두 넘어가 있었습니다. 실망한 신부님은 다시는 교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임실로 왔는데 농촌의 현실도 비참했습니다. 또 다시 마음이 흔들렸고 초지가 많은 임실에서 산양을 키워 젖을 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미화 2,000불을 받아 허름한 치즈공장을 세웠습니다.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습니다. 갖은 고생을 다하며 3년을 보냈는데 안 되니까 아예 프랑스와 이태리까지 가서 기술을 배웠습니다. 1969년 드디어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몸에는 좋지만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질 않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만든 치즈를 외국인이 많은 호텔, 남대문 외국인 전용상점, 명동의 피자가게에 직접 가지고가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임실치즈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 신부님의 땀의 열매입니다.
신부님은 시골마을에만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 아닙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항거했습니다. 이일로 어려움을 당했고 추방위기도 맞았습니다. 평생 힘겨운 삶을 사셨기에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찾아와 몸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휠체어 신세를 졌는데 그것 때문에 중증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가족”을 설립했습니다. 1981년, 신부님은 치즈공장의 운영권과 소유권을 모두를 주민협동조합에 넘겼습니다. 빈손으로 이 땅에 온 신부님은 처음 온 그 모습대로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사람의 삶에 향기가 난다면 그것은 희생과 헌신 때문입니다. 주안에서의 수고와 고통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도 향기가 나고 있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