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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감동과 신명나는 삶을 위하여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19-06-11조회 : - 첨부파일 :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여러 면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는 수준 높은 대회였습니다. 세계의 매스컴들은 하나같이 “평창동계올림픽은 한국인들에게 ‘경쟁의 품격’,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선물로 안겼다고 평가했습니다. 평창 동계올릭픽은 준비나 진행, 세부적인 행사 하나하나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평가받았는데 그 중심에 송승환 총감독이 있었습니다.
사실 평창올림픽 같은 세계적인 행사는 준비과정이나 진행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는 말하기를 개막식과 폐막식의 경우 3초 단위로 콘티를 짰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실수와 문제를 줄이기 위하여 수 백 번의 리허설과 점검을 했다는 것입니다. 날씨라도 도와주면 좋겠는데 강원도가 얼마나 춥습니까? 매일 영하 20도로 내려가는데 바람까지 부니까 체감온도는 영하 30도가 넘습니다.
그는 원래 아역배우 출신입니다. 1965년 아역 성우로 방송에 데뷔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행사의 총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역 성우로 데뷔한 그는 1968년 연극 “학마을 사람들”로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우에서 배우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대를 TV로 옮겨 “아씨”, “여로” 등을 하면서 탤런트와 배우로써 확고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20대에는 당시 인기 최고의 쇼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 MC를 맡았고, 사려 깊고 명랑한 진행 솜씨로 MBC 라디오 간판 프로인 “양희은 송승환의 여성 시대” DJ로도 오랫동안 활약했습니다. 성우에서 연극배우로, 연극에서 탤런트로, MC로, DJ로 방송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휩쓸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방송가에서 사라졌습니다. 나이 마흔에 나타났는데 사물놀이의 흥이 넘치는 아크로바틱 서커스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1997년 한국적인 흥을 세계 언어로 풀어낸 비언어극 “난타”를 호암아트홀에서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57개국 310개 도시를 돌며 지금까지도 갈채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손대는 것 마다 성공시켰고,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하게 했을까요?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결정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우활동을 한 것입니다. 목표를 위하여 과감하게 버릴 것을 버린 것입니다. 둘째는 세계 시장에 도전하겠다고 “난타”를 만든 것입니다. 지금의 성공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활동영역을 세계로 넓힌 것입니다. 세 번째를 가장 잘한 결정인데,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문화부장관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연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성공으로도 충분한 인기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장관을 하면 명예도 있고, 폼 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지금처럼 신명나게, 감동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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