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0313-한 생명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사건을 이룹니다.
작성자 : 관리자작성일 : 2022-04-29조회 : - 첨부파일 :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개신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역사에 크게 기여한 교회들 중 곤당골교회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특별히 봉건시대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기에 곤당골교회가 신분질서 타파와 인권운동을 시작함으로서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우뚝 섰기 때문입니다. 19세기말 조선은 양반, 중인, 상인, 천인 등 네 계급의 신분질서 사회였습니다. 10%에 불과한 양반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기생, 무당, 광대, 포졸, 갖바치, 고리장, 백정은 소위 ‘7대천인(賤人)’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특히 백정은 인도의 가장 아래 계급인 불가촉천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무어 선교사(S.F. Moore)가 서울에 도착하여 백정들이 사는 동네, 곤당골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92년 6월, 그곳에 곤당골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계기가 감동적입니다. 백정 박가가 콜레라에 걸렸습니다. 다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이 급히 무어 선교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가서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무어 선교사님은 친구이며, 고종의 어의였던 에비슨 선교사님에게 연락하여 박가의 콜레라를 치료해 줍니다. 왕의 어의가 백정을 찾아가 치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감동을 받은 박가와 동네 사람들에 의해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양반들과 중인들도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양반들이 선교사님에게 면담을 요청합니다. “선교사님, 우리 양반들에게는 따로 앞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저들과 함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선교사님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선교사님은 그들의 요구에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예수 안에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습니다.”1904년, 부흥하여 인사동으로 이사한 곤당골교회는 이름을 승동교회라고 바꾸었습니다. 장로 1인을 선출하게 되었는데 양반들과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공동의회에서는 백정 출신의 박가, 후에 성춘이라 이름 한 그 분이 초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후에 그 교회를 통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박성춘 장로님은 고종 황제에게 청원하여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이루었습니다. 한일 합방 이후에는 북간도로 이주하셔서 숭신학교를 세우셨고, 청년교육에 헌신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박의양은 세브란스 의전을 1회로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939년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그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백정을 섬긴 일이 한국 근대사와 교회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한 생명을 향한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사건을 이룹니다.
-
